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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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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관 참선비촌 전시체험관입니다.

큰선비들관

큰 선비들

  • 퇴계 이황, 율곡 이이, 서애 유성룡, 미수 허목, 대산 이상정, 다산 정약용, 이상용 선생 등 큰 선비들의 발자취를 그래픽 판넬에 설명해놓았습니다.
    • 퇴계 이황

      퇴계 이황

      • - 1501년(연산군7)~1570년(선조3).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퇴도(退陶)·도수(陶搜). 안동출신.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고향에서 학문과 교육에 힘썼습니다. 68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어려서 왕위에 오른 선조를 돕기 위해,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와 필생의 심혈을 기울인『성학십도(聖學十圖)』를 지어서 올렸습니다. 그의 학문은 조선의 성리학을 심화하는 것이었고,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과 주리론(主氣論)으로 대표되는 퇴계학파를 형성하여 많은 제자들을 배출했습니다. 그의 학문은 중국과 일본까지 전해졌으며, 특히 일본 성리학의 태동에 결정적인 역활을 하였습니다.
    • 율곡 이이

      율곡 이이

      • - 1536(중종31)~1584(선조17). 강원도 강릉 출생.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석담(石膽)·우재(愚齋).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을 해서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습니다. 그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로 대표되는데, 이(理)를 객관적 실재라기 보다 기(氣)의 법칙성으로 이해하는 것으로,이와 기의 통일성을 강조하는 주기론(主氣論)이었습니다. 이러한 학설을 이어받은 율곡학파는 퇴계학파와 쌍벽을 이루게 됩니다.
    • 서애 유성룡

      서애 유성룡

      • - 1542(중종37)~1607(선조40).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 퇴계 이황(李滉)의 문인. 왜란이 있을 것에 대비해 권율(權慄)과 이순신(李舜臣)을 일선에 추천하였습니다. 1592년 4월 13일 일본군이 침입하자 곧 조선의 군무를 총괄하는 임무를 맡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책임을 다했습니다. 국방과 백성을 위한 여러 계책을 제시하였고 실현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1598년 탄핵을 받고 고향에 은거하였습니다.이 시기에 『징비록(懲毖錄)』을 비롯한 저작들을 저술하였습니다. 도학(道學)·문장(文章)·덕행(德行)·글씨로 이름을 떨쳤고, 특히 영남 유학자들의 추앙을 받았습니다.
    • 미수 허목

      미수 허목

      • - 1595(선조28)~1682(숙종.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문보(文甫)·화보(和甫), 호는 미수. 현종때 남인과 서인의 사상논쟁인 복제(腹制) 논쟁(상복(喪服)에 대한 논쟁)에 적극 참여하였고 이후 청남(淸南) 세력을 이끌었습니다. 과거를 보지않고도 삼공(三公:우의정·좌의정·영의정)에 올랐으며 사상적으로 이황(李滉)·정구의 학통을 이어받아 이익(李瀷)에게 연결시킴으로써 남인 실학파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그림·글씨·문장을 모두 잘했으며, 글씨는 특히 전서(箭書)에 뛰어나 동방 제1인자라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 대산 이상정

      대산 이상정

      • - 1711년(숙종37)~1781(정조5). 안동 출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경문(景文). 호는 대산(大山). 관직에 진출을 꺼렸으며, 대산서당 (大山書堂)을 짓고 제자 교육과 학문 연구에 전념했습니다. 상대적으로 침체된 영남학파에서 이황의 계승을 주창하고 일어나, 이현일·이재로 이어진 영남 이학파의 중심적 인물입니다. 이황의 사상을 계승하고 정의하는 입장에서 사상적 터전을 마련하였습니다. 일방적인 주리론에는 반대하였고, 이(理)와 기(氣)의 심오한 뜻의 탐구에 노력했습니다.
    • 김성일

      김성일

      • - 1538(중종 33)∼1593(선조 26). 본관은 의성.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峰). 아버지는 진(璡)입니다. 이황(李滉)의 문인입니다. 1568년(선조 1) 증광 문광에 급제하여 정자·검열·대교 등을 거쳤습니다. 그뒤 부수찬·정언 등을 지내고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뒤, 1577년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가서 종계변무(宗系辨誣)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뒤 함경도순무어사·사간·황해도순무어사를 지냈으며, 나주목사로 있을 때는 대곡서원(大谷書院)을 세워 김굉필·조광조·이황 등을 제향했습니다. 학문적으로 이황의 주리론(主理論)을 계승하여 영남학파의 중추 구실을 했으며, 예학(禮學)에도 밝았습니다. 저서에 <상례고증 喪禮考證>·<해사록 海사錄>·<학봉집>이 있으며, 이황의 <자성록 自省錄>·<퇴계집> 등을 편집·간행했습니다. 안동 호계서원(虎溪書院) 등 여러 곳에 제향되었습니다. 시호는 무충(文忠)입니다.
    • 이상룡

      이상룡

      • - 1868(철종9)~1932. 본관은 고성(固城). 초명은 상희(象羲). 자는 만초(萬初), 호는 석주(石洲). 안동 출신. 1896년부터 의병 항전을 시도하였습니다.. 이후 국내에서 의병 항쟁은 어렵다고 판단하고, 애국계몽운동을 전개. 1911년 집안을 이끌고 서간도 봉천으로 건너가 항일민족 독립운동을 펼쳤습니다. 1919년 3·1운동 뒤 군정부 총재로 추대됨. 5월에는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신흥무관학교로 바꾸고 독립운동 간부를 양성하였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군정부를 서로군정소(西路軍政署)로 바꾸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지하였습니다. 이후 만주 각지의 항일단체와 독립군단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 정몽주

      정몽주

      • - 1337(충숙왕 복위6)~1392(공양왕 4). 본관 영일(迎日). 자 달가(達可), 호 포은(圃隱). 초명 몽란(夢蘭)·몽룡(夢龍). 시호 문충(文忠). 영천(永川)에서 태어났습니다. 1357년(공민왕 6) 감시에 합격하고 1360년 문광에 장원, 예문검열(藝文檢閱)·수찬·위위시승(衛尉寺丞)을 지냈으며, 1363년 동북면도지휘사 한방신(韓邦信)의 종사관으로 여진족(女眞族) 토벌에 참가하고 1364년 전보도감판관(典寶都監判官)이 되었습니다. 1367년 성균관이 중영(重營)되면서 성균박사(成均博士)에 임명되었습니다. 1517년(중종 12)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 등 11개 서원에 제향되었습니다.
    • 정약용

      정약용

      • - 1762년(영조 38)∼1836년(헌종 2). 자는 미용(美鏞). 호는 다산(茶山)·사암(俟菴)·여유당(與猶堂)·채산(菜山). 근기(近畿) 남인으로, 정조(正祖)대에 관직 진출했으나, 청년기에 접했던 서학(西學:천주교와 관련된 학문)으로 인해 오랫동안 유배생활을 하였습니다. 유배기간 동안 자신의 학문을 더욱 연마해 사서육경(四書六經)에 대한 연구를 비롯해 『경세유표(經世遺表)』·『목민심서(牧民心書)』·『흠흠신서(欽欽新書)』 등 모두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고, 이 저술을 통해서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사회 개혁상을 제시하였습니다.
    • 조광조

      조광조

      • - 1482(성종 13)∼1519(중종 14). 본관 한양. 자 효직(孝直), 호 정암(靜菴). 시호 문정(文正). 개국공신 온(溫)의 5대 손이며, 감찰 원강(元綱)의 아들입니다. 어천찰방(魚川察訪)이던 아버지의 임지에서 무오사화로 유배 중인 김굉필(金宏弼)에게 수학하였습니다. 1510년(중종 5) 진사시를 장원으로 통과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던 중, 성균관에서 학문과 수양이 뛰어난 자를 천거하게 되자 유생 200여 명의 추천을 받았고, 다시 이조판서 안당(安塘)의 천거로 1515년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에 임명되었습니다. 같은 해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에 들어갔으며 전적·감찰·정언·수찬·교리·전한 등을 역임하고 1518년 홍문관의 장관인 부제학을 거쳐 대사헌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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